시대가 보내는 전언을 실어 나르는 매체들은 이제 온통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기호들로 점령당했습니다. 이른바 ‘자비스’라 불리는 에이전트 AI가 도래하고, 인간의 모습을 모방한 로봇들이 지상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공상과학 영화가 스크린을 찢고 나와 현실로 육화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우리는 경탄과 짙은 우려 사이를 배회합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 사유하고, 영혼이 부재한 언어를 무한히 생산해 내는 서늘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러한 기술 혁명은 단지 자본을 재편하고 생산 체계를 뒤바꾸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기계가 창조주를 모방하며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깊숙한 심연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문명이 급변하는 길목마다 인류는 이러한 질문과 마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땀 흘려 써 내려간 활자와 숨결이 담긴 로고스마저 위협받는 지금, 기계 문명 앞에서 던지는 질문이 뿜어내는 무게는 과거와 사뭇 다릅니다.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하는 사순절은, 부서지지 않는 금속과 데이터가 내뿜는 가짜 영원성 앞에서, 결국 먼지로 돌아갈 인간 존재가 지닌 필멸을 뼈저리게 상기하는 전례입니다.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이 “인간은 세속이 흐르는 현재를 호흡하면서, 동시에 성서가 증언하는 거룩한 시간을 살아낸다”고 말했듯, 우리는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오늘을 살면서도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고대 시간에 접속합니다. 사순절이라는 엄숙한 절기를 맞아 이번 호에는 몇몇 분들이 추천한 ‘사순절에 읽으면 좋을 책들’을 특집으로 엮었습니다.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묵묵히 활자를 벼려내어 원고를 보내주신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이번 달부터는 ‘엠마오의 픽’과 더불어 Honorable Mention을 나란히 소개합니다. 이달의 책을 심사하고 선별할 때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합이 벌어졌고 최종 목록에 오른 도서 중 하나만 소개하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데 입을 모았습니다. 작은 변화지만 책들을 하나라도 더 온전히 조명하고자 하는 엠마오의 바람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린다는 절기, 우수雨水를 지났습니다. 머지않아 도래할 봄날, 세상은 여전히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빠르고 매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하겠지만 저희는 묵묵히 활자를 읽어내는 고독한 순례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여정을 걷는 분들 곁을 지키겠습니다. 활자를 사랑하는 구독자 여러분 곁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동행자가 되기를 다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