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10월의 끝자락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책과 강연들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일종의 순환이랄까요. 하지만 그러한 순환 가운데서도, 가끔은 문명의 깊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울림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올해가 바로 그렇습니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지 1,700년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산물인 니케아 신경, 그 신경이 나와 울려퍼진지 1700년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신을 어떻게 말하려 했는가에 대한 역사의 집단 기억을 다시 불러옵니다.
얼마 전 열렸던 기념 강좌 자리에서 정교회 대주교와 장로교 두 교단의 신학자, 그리고 성공회 학자가 한 무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른 전통, 다른 언어, 다른 예배의 리듬을 지닌 이들이 하나의 신경을 매개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종종 잊곤 하는 사실, 신앙이란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과연 누구인가? 라는 단순하고도 당혹스러운 질문 앞에서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치열한 논의 끝에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고백을 새겼습니다. 인간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고도의 긴장과 집중, 당혹스러움, 난처함, 경외, 신뢰, 고백을 우리는 거기서 봅니다. 인간의 문해력이, 언어가 점점 더 쇠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점증하고 있는 이 시절에 저 아슬아슬한 고백은 더 눈부시게 다가옵니다.
서평지 엠마오는 창간 때부터 ‘그리스도교 출판의 지형도’를 그리겠다는 다짐을 품고 출발했습니다. 예견할 수 있듯이, 현실은 이 다짐을 지탱하기 쉽지 않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1,500분에 이르는 구독자들의 조용한 신뢰는 우리의 손을 붙잡아줍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지혜를 닮고 싶다는 바람은, 그래서 점점 더 절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10·11월호 합본에는 지난 두 달 동안 출간된 신간들의 프리뷰, 기획위원들이 고른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 로버트 젠슨의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그의 전망, 신학과 역사, 언어와 실재의 경계에 선 한 노학자의 응시를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그 응답이야말로 이 시대 신학의 온도이겠지요.
날씨가 확연히 차가워졌습니다. 그러나 차가움 속에서도 우리의 사유는 흔들리지 않기를, 그 사유에 긴장과 집중과 당혹스러움과 난처함과 경외와 신뢰와 고백이 있기를, 신앙의 언어가 다시금 우리를 그 깊은 자리로 데려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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